삼성산성지 연혁
삼성산성지의 이야기와 연혁을 소개합니다.
삼성산 성지(서울시 관악구 삼성동(구 신림동) 57의 1)는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앵베르(L. Imbert, 范世亨) 주교, 성 모방(P. Maubant, 羅伯多祿) 신부와 성 샤스탕(J. Chastan, 鄭牙各伯)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온 교회 사적지이다.
본래 ‘삼성산’이란 명칭은 고려 말의 명승 나옹·무악·지공 등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곳 한 자락에 천주교 성직자였던 세 명의 성인 선교사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그 결과 1970년대 이후 천주교 안에서는 ‘삼성산’을 가리켜 ‘세 명의 성인 유해가 안장되었던 성지’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는 1857년에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다.
그리고 1882년 5월부터는 다른 순교자들과 함께 시복을 위한 교회 재판이 시작되었으며,
1885년에 시복 판사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는 1886~1887년에 삼성산으로 가서 순교자들의 묘역을 확인하였다.
그 후 시복 추진 작업이 결실을 맺을 단계에 이르자, 서울교구에서는 1924년에 명동 대성당 지하 묘역에 안치되어 있던 세 가경자의 유해를 꺼내 일부만을 남겨둔 채 대부분 로마나 파리 등지로 분배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분배처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세 가경자는 이듬해인 1925년 7월 5일에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 봄, 대방동 본당 주임으로 있던 오기선 신부는, 최석우(안드레아) 신부의 자료 고증과 정원진(루가) 신부의 회고를 토대로 삼성산 무덤 자 리를 찾게 되었다. 그 해 5월 12일에는 옛 무덤 자리에 ‘삼성산 순교 성지 기념비’를 건립하였으며,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그리고 박순집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 1981년 9월 6일에는 신림동 본당 신자들이 노기남 대주교의 집전 아래 삼성산에서 세 복자 묘비 제막식을 갖고 기념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로써 삼성산을 순례 성지로 성역화 하려는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82년 9월 29일 신림동 본당에서는 유영도(디오니시오) 신부의 지도 아래 ‘삼성산 성역화 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시성식이 있던 1984년에는 교구와 신림동 본당에서 삼성산 성지 일대의 부지 15,800여 평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89년 9월 10일에는 성인 무덤을 새로 조성 단장하고, 제대 및 울타리를 설치 완료한 뒤 교황 대사 이반 디아스 대주교와 파리 외방전교회 한국 지부장 배세영 신부, 오기선 신부, 유영도 신부의 공동 집전 이래 무덤 축복식을 가졌다.
특히, 이날 명동 대성당 묘역 안에 남아 있던 성인 유해 일부를 다시 삼성산으로 가져와 무덤 안에 안치하였다.
1992년 9월 24일 삼성산 본당이 설립되면서 삼성산 성지의 관리는 이 본당에서 맡게 되었다.
삼성산 본당은 1993년부터 본당내에 현양위원회를 두고 본당 차원의 현양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즉, 성지 순례객과 삼성산을 등반하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주일 11시에 성지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며, 매월 21일에는 세 성인의 치명한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순교자 현양 미사가 정례적으로 봉헌하고 있다.
삼성산 성지는 자연속에서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에 레지오 단체의 야외 행사나 서울시내 본당의 각종 단체 행사 등 순례객의 발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